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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인보'는 부자간 이어준 끈 의미 일깨워준 중앙일보에 감사

일제에 강제징용 당했다가 미군 포로가 되어 하와이 수용소 생활을 했던 2700여 명의 한인들이 제작한 소식지 '자유한인보' 4,5호의 진본이 발견되어 중앙일보가 단독 보도한 바 있다.〈8월 15일자부터 5회〉 이 자료는 20살 나이였던 1944년 징용에 끌려갔던 권임준씨(경북 의성 출신.2000년 작고)가 1945년 12월 하와이에서 귀국선을 타고 나올 때 가져온 것으로 '독도화가'로 알려진 아들 권용섭(56) 화백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보도가 끝난 뒤 권 화백이 보내온 이메일을 소개한다. 이번 '자유한인보' 시리즈 기사를 보면서 중앙일보는 흙탕에서도 진주를 캐는 신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자유한인보를 미국까지 안고 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였던 것 같습니다. 자유한인보는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이었습니다. 왔나?, 가라, 밥 묵어라, 자자, 이런 경상도 대화법. 게다가 우리집은 유별난 유교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내인 저는 아버지가 좋아 남달리 따랐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이장을 오래 하셨는데 시골 이장 업무라는 게 별별일을 다하는 거지만 저는 아버지의 봉사가 숭고해서 심부름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보고 '작은 이장'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제가 1977년도에 독도를 가려다가 울릉도에서 4명이 죽고 2명만 돌아와 혼이 나간 상태로 멍해 있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아 야 죽음이란 순식간이고 산 사람은 움직여야지 맨날 그카고 있을 끼가? 사람이 죽는 건 정한 이친데…" 하시며 "내가 오키나와에서는 말이야…"이렇게 증언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부지~그거 진짜 아부지가 겪은 이야깁니꺼?" 하며 제가 아버지께 빈 노트를 한권 드리며 숙제를 드리고 고향 집에 갈 때마다 독촉한 게 바로 증언 연재물' 태평양전쟁'입니다. 아버지 세대들에 대한 불쌍함, 생전에 이해 못 하고 잘 해주지 못했던 죄책감, 아쉬움…. 저에게는 자유한인보는 자료나 유물이기 전에 아버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향기이자 유일한 끈 입니다.

2014-08-24

'민족의식 실증' 귀중한 사료…미군 특수요원 선발 6인이 주도

본지가 발굴, 창간 40주년 기획으로 5회에 걸쳐 연재 보도한 '자유한인보'에 대해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자유한인보'는 일제에 징용돼 남양군도 등에서 미군 포로가 됐던 2700여명의 한인 징용자들이 하와이 수용소에서 만든 주간지다. 본지는 '독도 화가'로 유명한 권용섭씨의 부친이 보관하고 있던 진본 4, 5호를 발굴 보도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홍선표 책임연구원이 '자유한인보' 발굴 의미를 기고로 보내왔다. [편집자] ------------------------------------------------------------ '자유한인보' 4호와 5호의 진본 발견은 이번 광복절의 의미를 매우 뜻 깊게 만들어 주었다. 이번 자료를 발굴해 보도한 미주중앙일보의 노력과 자료 소장가의 큰 결단에 대해 관련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자유한인보'는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잡지 일지 모르나 이미 3호와 7호가 소개되어 있어 비교적 국내 학계에 익히 알려진 자료이다. 그럼에도, 새로 발굴된 '자유한인보' 4호, 5호가 재미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국내에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전체 7권 가운데 약 절반 이상이 모아짐으로써 향후 이 자료를 둘러싼 역사적인 성격을 더욱 밝힐 수 있게 된 점이다. 이번 잡지는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수용된 한인들이 해방 후 귀국을 앞두고 자체의 단결을 도모하고 강제 동원의 경험을 토대로 귀국 후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을 대비하기 위해 발행되었다. 하와이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인들은 크게 징병이나 학병에 의한 동원된 군인과 징용된 군속(노무자)으로 나누어진다. '자유한인보' 의 발간을 주도한 인물은 박순동, 박형무, 이종실이다. 이들은 1945년 3~4월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한 학병 출신 포로들이었다. 미군은 이들 세 명과 사이판에서 일본군 노무자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위스콘신 주 맥코이(McCoy)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이종흥, 김현일, 김필영 등 3명을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산타 카탈리나섬에서 납코계획(NAPCO Project)의 요원으로 선발해 침투훈련을 시켰다. 미군이 이들 6명의 포로들을 특별 요원으로 선발한 것은 한인 포로들 가운데 항일투쟁정신이 매우 뛰어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납코계획은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OSS(미 전략첩보국)가 한반도에 잠수함과 낙하산으로 공작원을 침투시켜 정보수집, 거점확보, 사보타지 등의 활동을 벌이기 위해 추진한 한반도침투작전이다. 납코계획에 참가한 한인은 유한양행의 창설자인 유일한을 비롯해 19명이었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박순동 등 3명과 맥코이포로수용소에서 선발된 이종흥 등 3명은 1945년 5월부터 9월까지 샌타카탈리나섬에서 침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이 훈련을 마칠 때쯤 일본의 항복으로 납코계획이 무산되어 박순동 등 6명은 하와이포로수용소로 수용되었다. '자유한인보'가 발행된 때는 박순동 등 6명이 1945년 9월 말 하와이포로수용소로 수용된 직후인 10월 말이었다. 하와이포로수용소를 운영한 미군측은 특수임무를 띠고 군사훈련을 받았던 이들 한인 포로들을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러한 신뢰 속에 박순동, 박명무, 이종실은 수용소 측의 지원과 협조를 받아 '자유한인보'를 발행하였다. 이처럼 '자유한인보'는 강력한 항일정신을 가진 학병 탈출 포로이자 미군의 특수공작요원으로 한반도 침투훈련을 받은 자들에 의해 발행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이 잡지의 성격이 얼마나 철저한 항일 독립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지를 잘 시사해 준다. 따라서 새로 발굴된 '자유한인보' 4, 5호는 당시 한인 포로들이 가진 일상의 단면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즉, 강제 동원된 이후 생사를 넘나든 숫한 고비 속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일제의 침략 죄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한인들의 뜨거운 민족의식을 실증하는 귀중한 역사자료라는 점 때문에 이번 자료 발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선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책임연구위원>

2014-08-21

포로들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문학적인 품격과 낭만이 넘쳐 (5) 에필로그-인문과 여유

시·수필·소설 등 다양 한국어 연구에도 쓸모 "…토굴 속으로 폭탄이 날아왔다. 어둠 속에서 발밑에 걸리는 게 물컹거린다. 뛰어 넘으면 또 밟히고 넘어지면 손에도 피범벅된 사람의 신체 부위가 만져졌다. 세상 어딜 간들 이런 지옥이 있을까. 가는 곳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총 한자루 없이 수없이 터지는 공습과 함포 사격에 맞으면 죽고, 안 맞으면 잠시 생명을 연장하는 곳…" 하와이 포로생활을 하다 '자유한인보'를 가지고 귀국선을 탔던 권임준씨(2000년 76세로 작고)가 생전에 남긴 오키나와 징용생활 증언이다. 아들인 '독도화가' 권용섭(56)씨가 증언을 글로 남긴 것이다. 20살 나이에 끌려가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다 1년 5개월만에 귀국선에 오른다. 권임준은 동료 2700명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주소록 끝에 펜으로 시를 쓴 뒤 '1945년 12월 27일 선상에서'라고 맺는다. 身在南洋化土盡(몸은 남양에서 흙이 되었고)心魂北雁白雲歸(혼령은 북방 기러기와 구름되어 돌아가네) 海外英靈今安在(해외의 영령이여 이제 편히 계시게) 槿花天地日復明(무궁화 천지에 피고 태양도 다시 빛나리) 일제 패망 후 1945년 11월, 12월 2개월 남짓 기간동안 만들었던 포로 소식지 '자유한인보'에는 생사를 넘나든 포로들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문적 품격과 여유가 넘친다. 21살 권임준이 남긴 한문시는 그들의 내면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연재소설도 있다. 향천이라는 이름의 필자는 '초월한 사랑'이란 소설에서 상처한 남자를 연모하던 처자가 찾아온 장면을 묘사한다. "…지금까지 황천객된 처를 생각코 셔글퍼 하엿쓰나 의외에 자기를 차저온 낭자를 보니 정신이 황홀하여질만치 곱고 아름다웟고 따라서 연정에 못이기여 온 것을 생각하니 깃부기 짝이 업서 달콤한 말을 주고받을 따름이다…" 수용 한인들 중에는 적지 않은 작가, 문인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란 짐작을 하게 한다. 문학과 역사에 대한 향기는 곳곳에 남겨진 시와 수필, 소설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창씨개명한 '야마히토'란 필자는 '내 역사 내 고향'이란 시에서 '역사의 죄를 지고/지옥을 헤매든 날/거기는 사람 찌는 가마솟도 있고/바늘로 얼킨 산도 잇썻다/그러나, 그러나…/뮈우면서도 그리운 것은 내 역사 내 향토엿다…'라고 노래했다. 조국에 대한 애증이 묻어난다. 박순동 필자는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에서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키는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일화를 역사소설 방식으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수천명은 법의와 염주를 놋고(놓고) 갑주와 창검을 가추고 서산의 절 뜰에 느러서잇다…후에 서산은 몸이 달토록 나라일에 힘을 쓰고…" 자유한인보는 과도기 우리말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쓰는 사람마다 표기법이 다른 것이 많아 한글맞춤법이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 표기법 연구에도 좋은 소재가 될 전망이다. 외국어표기에서 v발음을 ㅇ을 ㅂ옆에 붙인 '순경음ㅂ'으로 표기하고, Martin을 '마-ㄹ틴'으로 표기하는 등 지금보다 더 원음에 가깝게 표기했다. 자유한인보에서 펼쳐진 곱고 순수한 우리말 향연도 놀랍지만 논단의 글에선 어찌 저토록 강력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감탄한다. 이원영 기자

2014-08-19

"아사히가 조타(좋다) 마실 뿐이엿지 맥주 한병 제조한 사람 잇는가"…(4) 선진 문물에 대한 갈망

미국 문명 경험 조국 걱정 기술·교육 등 개선 애태워 필진의 높은 지식수준 반영 숱한 고비를 넘기다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일제징용 한인 포로들. 2700명이 미군 하와이 수용소에서 갇혀 있다가 마침내 귀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만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유한인보'. 고향과 가족을 그리는 마음이 넘쳐났지만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조국이 발전해야 한다는 간절함도 넘친다. 본보에 의해 자유한인보 1~7호 중 4, 5호가 처음 알려졌는데 4호 '세계뉴스' 코너에서는 '우리나라 소식'도 전한다. '서울의 위생에 대하야'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글이다. "…서울에 수세식 변소가 없는 것은 건강상 큰 위험이며 완전한 수도가 설시(設施)되지 못한 것은 불편한 것이다…위생에 관해서는 한인은 마음 섭섭할만큼 연구나 경험이 없다…." 서울에서 통계 사무를 보던 앤드루 왕이라는 한인 미군대위의 보고서를 번역한 것이다. 하와이 해변 청소 등을 하면서 미국의 문명을 접한 한인들의 눈에는 수세식 변소가 없는 서울의 모습이 낯뜨거웠을 것이다. '콜롬비아의 도시개선'이라는 논단도 나온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나온 실비아 마틴이라는 사람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콜롬비아국은 산이 많아서 국민은 깊은 계곡에 갇혀 살고 각부락은 높은 준령으로써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나라에 어떠케해서…20세기의 문화를 다른 나라에 지지않게 보존하게 되엿는가. 이 문화 향상의 비결은 공공향상회(The Soceity for Public Betterment)가 잇는 것이다…전국의 지부를 통해서 19세기부터 열렬한 개혁이 잇었다…이 회원은 국가 장래를 위하여 국민을 지도할 만한 공공정신을 갖인 사람들이다…아무도 사리(私利)를 거둔 사람은 없었다…" 이 글을 소개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다. 박형무 필자는 '자유독립의 기초-기술자의 양성'이란 글에서 우리나라의 낙후된 기술을 한탄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역설한다. "…실상 넓지도 않은 조선내지의 철도 하나를 우리 손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대한사람의 대한이라고 부르짓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고…자연과학의 이론적인 기초연구에 관해서는 여기에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가 '아사히'가 조타(좋다), '키링'이 조타, '삽뽀루'가 조타 하며 마실뿐이엿지 맥주 한병 똑똑히 제조한 사람이 조선 사람 중에서 누구엿뜬가…" 박형무는 이같은 과학기술의 낙후는 일제가 교묘하게 이런 교육을 시키지 않은 탓도 크다고 했다. 글은 이렇게 맺는다. "…귀국일이 목전에 닥친 우리들은 마치 자유독립의 나라에 향락을 찾아가는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잇으나 자유독립의 기초는 즉 기계를 부리고 고치고 물건을 제조하고 하는 우리 자신의 피와 땀의 실력에 잇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리종실 필자는 '교육과 환경'이란 글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미국의 '해랭케라(Helen Keller)'여사는 맹인과 농아를 겸한 사람이었으나 그 일홈(이름)이 세상에 들내게 된 원인은 교육의 힘이라 할 것이다…패스터롯치(페스탈로치)씨는 서서국(스위스)인으로 자기 일생을 아해(아동)들 교육에 헌신한 사람으로…" 이같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서당이나 가정에 잇어 아해들의 의사를 전연 무시하며 부형 또는 선생의 의사만 맹목적으로 주장하며 강요하여 왔다…그러니까 의사불상통으로 아해들에게 모욕을 주는 경우가 많다…" 70년 전의 주장으로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진취적이며 지성적이다. 지금 내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이원영 기자

2014-08-18

5호에 실린 편집자 글 '대한사람 대한으로'

자유한인보 5호에는 '대한사람 대한으로'라는 제목의 편집자 글이 실려 있다. 붓으로 38선을 지워 온전한 한반도를 그리는 그림도 실려 있다. 당시 조국을 되찾은 한인 징용자들의 심경과 각오가 이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의 전문을 당시 표기를 살려 전재한다. 대한사람 대한으로…이 말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표현하는 말인 듯하나, 출처는 여하간에 우리는 노래 삼어서 이 말을 얼마나 불럿든가! 그 정성이 통햇뜬지, 과연 대한은 일본의 손에서 해방이 되엇쓰나, 지금 형편을 보면 대한은 여전히 대한사람의 것이 않이다. 그 원인은 대한사람이 대한을 가질 힘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북위 38도 부근 지도를 실으니 이것은 우리의 고향이 소련이냐, 미국이냐를 알자는 것이 않이다. 이 선을 지우기 위하야 우리의 힘이 얼마나 한가를(있는가를) 반성하자는 것이다. 단결, 노력, 인내, 그리고 교육, 공업, 농업, 우리가 헤일(셀) 수 잇는 모든 문화의 힘이 여기에 집중되는 날, 우리가 이 선을 지우고 진실한 대한사람의 대한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은 독립이니, 자유이니 하는 것은 우리가 다맛 슬퍼하고 또는 성을 내고 소리를 지른다고 얻어지는 것은 않이다. 물러가서 고요히 우리들 자신의 힘을 도아야 할 것이다. 대한사람은 대한땅에 다리를 멧개나 놧는가. 대한사람은 대한땅에 공장을 멧개나 가졋는가. 대한사람은 대한에서 쓸 석(성)냥 한꼬치를 맨들(수)가 있는가. 말이 자유독립이 않이라, 실력이 자유독립이다. 북위 38도는 무슨 도(道), 무슨 군(郡), 무슨 마을을 뚤고 잇는지, 그것이라도 우선 알어보기로 하자. 이원영 기자

2014-08-17

"철망에 감금 당하엿으되 정신까지 포로는 아니다"…(3) 반성과 애국심

3.반성과 애국심 분열·갈등 개인주의 지적 미·소 남북점령 현실 개탄 완전독립 위한 총력 결의 '자유한인보'는 하염없는 하와이 포로 생활을 하다 일본 패전 후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시점에서 발간되기 시작했다. 1945년 11, 12월에 걸쳐 1~7호가 발간됐고 12월 26일 귀국선을 탔다. 귀국을 앞둔 2700명의 한인 포로들은 가족을 만날 들뜬 감상에 젖었지만 분열을 일삼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38선으로 갈리는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에 비분강개했다. 자유한인보에는 개인주의를 버리고 단결하여, 조국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자는 주장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4호에 익명으로 기재한 '우리들의 느낌'이란 글을 보자.(해독 가능한 표기 그대로 전재) "환향기에 닥친 동지여,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라! 이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분산을 합치는 것은 응당한 처사다. (중략) 세계의 정세를 깊이 살피자. 우리들 하나하나의 적은 힘으로 배겨낼 시대가 아니다." 포로들 사이에서도 많은 분열과 갈등이 상존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군의 앞잡이로 동족을 가혹하게 다뤘던 인물들도 있었을 것이고, 친일 행적 정도에 따라 내적 단합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 된다. 수용소 내부 교육보호 시설인 '숭신사(崇新舍)'를 소개하는 글에선 "…입으로는 자유독립 말하면서도 내집, 내마누라 생각뿐이고…아직도 양반예찬설이 한창이며…식당에서 내가 조흔 밥을 먹겠다고 피가 터지고…"라며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도호 필자의 '우리의 힘을 길릅시다'란 글도 비장하다. "민족공영이 즉 개인의 번영임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자족끼리 상살의 피를 씻으며 질투시기하고 호시탐탐 그 약점을 엿보고 잇는 침략자로 하여금 절호의 기회를 취득케하야 결국 동망(同亡)의 운명을 초치하야 금일에 이르게 함은…일가정의 생존과 안락만 취하고자 경쟁하엿지 민족전체와 국가란 것이 내 개인의 흥망과 연관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고 생각이 천박하엿으며 또한 무시한 소치로다….견인불발의 용기와 의중경명(義重輕命)하는 정신으로 국난을 돌파하고…."철저히 국력을 키워 다시는 비극을 맞지 말자는 결의다. 설악거사란 필명으로 쓴 글은 분단으로 치닫는 조국 현실에 대해 피를 토하듯 개탄한다. "신문 지상으로 보건대 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놋고 남에는 미국, 북에는 소련 양개국이 지배 하에 잇다는…현상태의 조국을 어데라고 불러야 옳으며 우리가 갈 곳이 어데라 칭해야 옳으리요…우리가 지금까지 일구동성으로 독립만 원하엿쓰나 시기가 당도하니 파당의 싸움으로 도라가고 귀한 시일만 허송하지 안는가…철망 속에 감금을 당하엿을망정 정신까지 포로는 아니다. 3천이 합심하야 일치한 정신으로 귀환한다면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한뭉치가 되여서 조국의 완전독립, 아니 억수만년의 자유행락의 무대인 금수강산 삼천리를 맨들 껏이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갈 조국을 또다시 미, 소가 분할 점령하고 있으니 그 착잡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유한인보 5호에도 애국적인 글은 곳곳에 스며 있다. 국천현 필자는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자'는 글을 남겼다. "죠국을 도라다보니 근심되는 바 많으며, 지금이 가장 중대한 위기인만큼 모든 파쟁을 깨끗이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40년 전 선배들이 조선의 완전강고한 독립국가를 창조하고저…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그 당시의 국정보다 지금의 국정이 더욱 위급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자주권을 위하야 대동단결하야 새조선 건설의 기초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더한층 조국을 사랑함으로 한번 죽어서 건국의 선봉이 되자…하루 바삐 우리 국토를 반환시키어 완전한 자주독립을 반석 우에 건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의 선배가 조국의 독립을 위하야 성심으로 제창하고 부르던 그 신념의 각서를 지금도 가지고 있음은 부인치 못할 것이다…." 이글을 보면 징용 포로들 중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했거나 그 계보를 잇는 인물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청년들로서 비록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가 그들을 위해 싸웠으되 마음만은 조국과 민족을 잊지 않았던 우국충정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던지는 울림이 크다. 이원영 기자

2014-08-17

한인 하와이 징용포로들의 소식지 '자유한인보' 진본 발견 (2) 그리운 가족과 고향

(*미군에 포로가 된 한인 일제 징용자들이 하와이 캠프에서 제작했던 주간지 '자유한인보' 1~7호 중 4,5권이 처음 발견됐다. 주요 내용을 연재한다.) 비록 미군의 포로로 잡혀 하와이에 수용되어 있지만 일본이 패망하면서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확실시되면서 수용자들은 고향과 가족을 그리는 마음을 자유한인보에 절절이 담았다. 수필이나 시의 형태로 아름다웠던 고향을 표현하고,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글로 달랬다. 1945년 11월 23일 발간된 4호 권두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1945년 12월 26일에는 우리가 기나긴 하와이 생활 전부를 영원한 추억거리로 싸담고 모국의 항구 인천으로 향하야 출발할 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다…" 전날 수용소 캠프 책임자인 해롤드 하월 대위가 대표 30명을 불러 귀국일자를 확인해 준 것이다. 전쟁과 노역, 그리고 숨막히는 포로수용소 생활 속에서 귀국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으랴. 감격은 이렇게 이어진다. (해석 가능한 당시 표기 그대로 인용함) "오래지 않아 우리는 (중략) 부모형제의 나라에서 몸을 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땀으로 파든 흙냄새도 맡어보고 (중략) 내 아들은 아즉 내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엇쓸 것이며, 내 마누라는 또 내 삼베옷에다 거쎈 풀을 멕여서 입혀주리라. 아즉도 주막에서 동무를 만나면 막걸리 한잔쯤은 마실 수 잇껫지…모든 것이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요,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고향의 산천, 가족, 친구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걱정도 비친다. 오랫동안 가지 못한 고향에 돌아가서 잘 적응하고 살 수 있을까. 빈 손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복잡한 심정이었으리라. 구한말부터 유행한 신체시(新體詩)의 형식을 빌려 그리움과 애잔한 추억을 노래하기도 했다. 귀국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1945년 12월 2일 발간된 자유한인보 5호에는 서경암이란 필자가 '고향행 소식'이란 시를 남겼다. "여기는 어데냐 꿈이냐 생시냐/외로웁고 이상한 타국 고도에/밤마다 쳐다보는 밝은 저 달은/사랑하는 향토에 비춰주지만 (중략) 순풍에 돗을 다라 뱃머리를 돌려서/그리운 옥토강산 속키 가보새" 같은 필자의 '버린 고향'이란 시도 있다. "버린 고향이 그러케 그리워서/기타줄을 골나매고 한곡조 타니/아버지 생각 어머니 생각/눈물 줄기 흘여서 앞을 가리니/꼬리 치며 집에 남은 얼룩이도 잘 있는냐(하략)" 박순동이 쓴 '추억 일편-깩짜리 캐든 날'은 징용으로 끌려오기 전 열일곱살 누이와 '깩짜리'를 캐며 나누었던 추억과 징집되며 헤어졌던 기억을 가슴시리게 묘사했다. "겨울 추위가 풀리고 보리가 자랄려고 몸을 펼 때쯤 되면 나는 해마다 깩짜리 캐기에 힘들었었다. 보리밭 꼬랑에 피는 독새풀을 캐서 베거름을 장만하는 것이다. (중략) 그때 열일곱살 먹은 누이도 깩짜리 망태를 머리에 이고 다니기란 그리 허고 싶은 일이 않이엿쓸 껏이다. 그래서 가끔은 논뚝에 걸터 안저서 먼 산을 처다보면서 서로 다른 생각에 넋을 일코 있뜬 때도 많엇다. (중략) 지금부터 2년 전 (징용으로) 내가 갈 바도 모르고 집을 떠날 때 누이는 벌써 네 어린애의 어머니엿다. 그때에 슬피 울어주든 누이를 생각하면 같이 철없는 이야기를 하든 날의 생각이 구름같이 가슴에 차올라서 마음 둘 곳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가족과 사람들, 조국 강토에 대한 향수가 구절구절 배어 나온다. 수용되어 있던 2700명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와 전쟁통에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다가 고향으로 갈 귀국선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 순간, 그들은 누구라도 서정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원영 기자

2014-08-15

한인 징용포로들이 만든 '자유한인보' 진본 발견

일제에 징용돼 남양군도 등에서 미군 포로가 됐던 한인 징용자들이 하와이 수용소에서 만든 주간지 '자유한인보' 4,5호 진본이 발견됐다. 자유한인보는 2700여 한인 포로들의 유일한 소식지로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이후 주간지 형태로 7호까지 발간됐다. 이 잡지는 한인 징용자들의 생활상은 물론, 한국 및 세계 정세 등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원본은 7호만 국가기록원과 독립기념관에 확보된 상태였고 2013년 말 3호 사본이 발견된 바 있으나 나머지 존재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3호(1945년 11월 15일), 4호(11월 23일), 5호(12월 2일)의 발간일을 감안할 때 귀국이 확실시되던 1945년 10월 말 첫호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며 7호(1945년 12월 12일)로 종간됐다. 이번 4,5호와 함께 7호 부록으로 발간된 전체 포로들의 이름과 주소가 담긴 명단도 발견됐다. 이 주소록은 한국 당국에서 보관하고 있지만 훼손돼 정확한 명단 파악이 어려웠으나 이번 목록엔 2700여 명의 온전한 리스트가 담겨 있다. 이번에 발견된 자유한인보는 '독도 화가'로 잘 알려진 권용섭(56.LA)씨가 부친이 남긴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확보했다. 부친 권임준씨는 경북 의성 출신으로 20살 때인 1944년 7월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오키나와에서 미군에 포로가 됐다. 권 화백에 따르면 부친은 1945년 12월 26일 귀국선을 타면서 자유한인보를 여러 권 가져왔지만 나머지는 유실되고 4,5권만 남았다. 부친은 2000년 타계했다. 자유한인보는 밀랍지에다 철필로 손글씨를 쓴 뒤 이를 등사기 롤러를 이용해 찍어내는 방식으로 만들었으며 한 호를 대략 300권 정도 찍었다. A4 크기 갱지에 한글.한문 혼용 세로쓰기며 4호는 68, 5호는 54페이지 분량으로 한쪽 면만 인쇄돼 있다. 구성을 보면 권두언을 시작으로 논단, 국제뉴스, 시(신체시), 역사,수필,연재소설, 퀴즈 등 시사교양 잡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독립기념관 홍선표 책임연구위원은 "이번에 4,5호가 발견됨으로써 1~7호 중 절반의 내용이 확보되는 셈이어서 징용실태와 독립운동사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영 기자

2014-08-14

손글씨 등사해서, 시사 교양잡지로 매주 발간…(1) 어떤 내용 담겼나

기고문 곳곳에 나라걱정 시사에 유머·퀴즈코너까지 시·수필에 녹아있는 향수 남북 다툼엔 안타까워해 해방을 맞이하던 시절, 지금부터 70여년 전. 한글 고어체의 흔적이 물씬 묻어나는 한글·한문 혼용체의 잡지를 읽어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그런데 글을 쓴 사람들이 일제에 징용으로 끌려간 한인들이고, 그들이 미군에 포로가 되어 하와이에 수용되어 있는 상황에서 쓴 글이라면 더욱 특이한 환경과 소재가 드러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나라를 잃고, 일제에 끌려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한 끝에 비록 포로가 되었지만 다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을 품은 식민지 출신 젊은이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그런 환경에서 손글씨 등사본으로 50~60페이지에 달하는 시사 교양잡지를 순전한 창작 기고문으로 매주 발간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최초로 발견된 '자유한인보' 4, 5호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공지·주장=자유한인보는 수용됐던 2700여 명의 소식지 역할을 담당했다. 4호의 권두언은 '귀국의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곧 조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소식을 실었다. 당시 포로 수용소 캠프 책임자는 해롤드 K. 하월 대위(당시 대좌로 불림)였다. 이 권두언에는 '하월 대좌가 우리들 중에서 30명을 본부로 청(請)하야 우리들이 바라는 귀국일을 발표하였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하월 대위가 '여러분의 귀국과 거기에 속한 여러가지 문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성명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2700명의 귀국 절차를 대표할 대표자를 선거를 통해 선출할 것과 12월 26일 귀국선이 떠날 것이란 내용이 들어 있다. 이 공고문에는 서로 손잡고 증오심을 버리라는 말이 나온다. 여러 기고문에도 단결하자는 내용, 조국이 분단되려 하는데 우리가 들어가면 힘을 합쳐 막아야 한다는 내용, 힘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 이기주의를 버리자는 주장 등 우국지사적인 큰 목소리가 곳곳에 배어 있다. '우리들의 느낌'이란 제목의 무명으로 쓴 글은 '반목질시하여 오던 오해를 일소하고…격렬한 단결에 공헌하자'고 호소한다. 징용포로들 중에서도 친일 성향의 정도에 따라 내부적으로 많은 갈등과 분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문학=전쟁의 참상 속에서 고통받고 외로웠던 심정, 그리고 고향을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시와 수필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고도(孤島)에의 추억'(김병태)이란 에세이에는 '마낑도'에서 미군 공습에 시달린 나머지 어느 날 밤 지붕을 오가는 고양이 소리에 누가 놀랐고, 그 소리에 공습이야, 상륙이야 하는 집단 공포가 퍼지면서 바다로 뛰어들고, 병이 깨진 곳으로 도망가다 다치는 등 아비규환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고양이 공습'의 웃지 못할 추억을 소개한다. 일제 말기 새로운 시 형태로 유행한 '신체시(新體詩)' 코너도 있다.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싸우는 바람에 통일 조국이 멀어지는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표현한 '조선'(유지석)도 눈길을 끈다. '붉은 적삼 파란 치마/세면하고 분 발으니/순진한 시골 처녀…북쪽에서 모여들고/남방에서 찾어와서/온갖 꾀임 다해가며/서로 탐만 내누나…' ▶교양='시론' 코너 4, 5호에 '콤롬비아의 도시 개선'이란 제목의 번역 글이 실려 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10월호에서 '씰비아 마-ㄹ틴'이란 사람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전문을 보면 '우리가 고국으로 돌아가면 도시정리문제가 중요할 것이다. 콤롬비아의 도시 개선의 역사를 기재하여 참고할까 한다'고 쓰고 있다. 내용엔 산이 많아 계곡으로 분리되어 살고 있는 콜롬비아 국민들이 '공공향상회'란 단체를 통해 국가적인 결속과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낙후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걱정한 흔적이 역력하다. ▶뉴스·시사='우리나라에 대한 미국 신문 사설'이란 제목의 글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한인은 일본인 같이 고양이처럼 살아왔다'라고 했는데 이는 한인을 업신여긴 것이고 1세기간 창조한 미국의 신망을 손상시킨 것이다'고 지적한 미국 신문 사설을 소개했다. 남북 사이에 38선을 그은 것에 항의하는 중국 등 해외동포들의 시위를 전하는 소식도 담겨 있다. ▶오락=유머, 퀴즈 코너도 있다. 지금으로 치면 O,X 문제인데 '조선 13도는 전부 바다를 끼고 있다' '향수 1온스를 만들려면 장미 40송이가 필요하다'에 맞다, 틀리다로 답하는 식인데 다음 호에 정답을 게재한다. 유머 코너엔 '처음보는 아들!?'이란 제목의 글도 있다. 귀국했더니 아내가 3살 짜리 모르는 아들을 키우는 걸보고 '(나)저 애는 웬 어린애요? (아내)저…저…(나)대관절 몇 살이나 되었오. (아내)세 살입니다. (나)오-그러면 내가 남양으로 온 지 아홉 달 되어서 난 것이로군…허허허허'라고 맺는다. 가족 생이별의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물 나는 유머가 아닐 수 없다. 이원영 기자

201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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